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도연맹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학살의 부당성 === >정부당국은 국가 존망이 걸려 있는 위기 상황에서 국가안보를 위해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방적 학살'이 불가피했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사상검사 장재갑은 "박헌영은 서울만 뺏으면 남로당 당원의 봉기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전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다.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것은 대한민국을 위험에서 건져준 행위였다."라고 학살을 정당화했다. 과연 정말 보도연맹원들이 대한민국에 위협적인 존재였을까? 당시 상황에서 보도연맹원들은 위협적인 존재일 수 없었다. 6.25 전쟁이 일어날 당시 남한 내의 혁명역량은 거의 초토화 되어 있었다. 작은전쟁을 통해 이미 10만여 명이 학살되었으며, 또 그만큼의 숫자가 감옥에 있었다. 좌익 검거과정에서도 보도연맹 전향자들의 정보 제공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는 남로당의 당조직을 파괴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보도연맹원들은 정부에 협조하여 정부·시민들의 피난을 도왔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부의 정당화론이 전혀 설득력이 없음을 드러낸다.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555~556쪽 위의 인용문에 나온 것과 같이 정당화론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전시나 특수 상황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그것이 설령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아도 사회 문제가 된다. [[베트남]]이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이 대표적인 예이고, 6.25 전쟁만 해도 즉결처분은 엄연히 군대 내에서 법적인 명령을 받고 행해졌음에도 전후에 사회 문제가 되었다. 보도연맹 살해는 사실상 그런 법적인 처형 명령도 없이 벌어진 일로서 국가 차원의 사과가 필요한 사항이다.[* 형무소 재소자에게 사형을 집행할 때에도 명부를 기록하고 절차에 따라 이뤄지는데, 보도연맹원들은 어떠한 기록도 없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으니 정치적인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북진 중에 발생한 보복성 학살에도 보도연맹원들이 대량으로 희생되긴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학살은 보도연맹원을 잡기보다는 적극적인 부역자를 색출,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 보도연맹원이 포함되었을 뿐이다. 보도연맹만이 아니라 당시의 광기(狂氣)는 상상을 초월한 마경이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인민군 복장을 한 무리가 북을 치면서 나타난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를 외치면 전부 학살, 이때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끌어내어 "김일성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한다. 강압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하면 또 즉시 처형. 결국 목에 총이 들어와도 "이승만 만세!"라고 외쳐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나? 순간의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 김일성 만세라고 외쳤는데 알고 보니 [[서북청년단]]원들이었다면 그냥 그렇게 빨갱이가 되어 살해당하는 것이다.[* [[임철우]]의 단편 소설 '곡두운동회'에서는 어느 시골 마을에 인민군들이 들어와 행세를 하자 일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한다. 하지만 이들 인민군은 알고 보니 좌익 색출을 위해 교묘하게 변장한 국군이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인민군 편에 붙었던 사람들은 [[학살|모두...]]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으니, 바로 [[나주부대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다만 이 경우는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주범이 국군이 아닌 경찰관들이었는데, 6.25 전쟁 무렵에는 경찰들도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투입되어 사실상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죽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형법에는 [[기대가능성]]이라는 게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범행 당시 상황에서 법을 위반하지 않을 것을 기대할 수 있었는가?'이다. 마을 사람들은 쳐들어온 자들을 인민군으로 오해했으니 기대 가능성이 아예 없어 죄를 물을 수 없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건 없었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소문의 벽'에서는 야간에 군인들이 나타나서 총을 겨누며 "이승만 지지자인가? 아니면 김일성 지지자인가?" 하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야간이라 잘 보이지도 않고 위에서 나온 일화처럼 인민군 복장을 갖추고 나타난 우익 단체일 수 있으니까 그저 세금 제때 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민초라고 말하며 덜덜 떨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정희상 씨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각지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무차별 총살한다고 당시 전쟁에 한국측으로 참전한 [[영국군]] 내에서 무력까지 사용하며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항의]]하기 시작했고,[*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독일 나치 홀로코스트로 인한 대학살의 트라우마를 안고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이런 비윤리적인 대학살을 벌이고 있으니 그들 입장에선 본인들의 트라우마를 건들기엔 충분했다.] 초기에 미적이던 태도를 보인 [[미군]] 당국마저 전쟁 후반이 되면서 한국에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251768926|링크]] 당시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에서 항의할 정도였다.[* 출처 1: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정희상/ 돌베개/ 1990년 7월 [[http://blog.daum.net/timur122556/2370|#]]] 보도연맹은 애초에 그 설립취지가 대한민국의 품에 좌익 경력자를 포섭하는 것,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을 강령으로 내세웠었다. 하지만 그토록 국민으로의 포섭과 포용이라는 명분이 강조되던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 용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승만 정부는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적성분자들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전쟁 초기부터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처음부터 보도연맹이 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직 초기에 보도연맹은 좌익을 교화시킴으로써 국민의 폭을 확대하려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협조할 수 있다는 혐의만으로 국민에서 배제되어 학살당했던 것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적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예비학살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공산주의 활동을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사람들을 포용한다고 말했으나,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가장 먼저 죽음을 당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